[중국선교역사] 중국에 온 최초의 미국선교사 브리즈맨
작성자: 중국사랑   등록일: 2013-11-02 13:23:16   조회: 967  


[중국선교역사] 중국에 온 최초의 미국선교사 브리즈맨

지난 호에서는 독일계 유태인 선교사 칼 귀츨라프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는 미국선교사로 최초로 중국에 온 브리즈맨(Rev. Elijah Coleman Bridgman, 裨治文, 1801-1861)을 소개하고자 한다. 브리즈맨은 1830년 2월 19일 미국해외선교부총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 美部會, 이후 ‘미부회’로 간칭함)의 파송을 받았다. 광저우(廣州)에 첫 발을 딛고, 1861년 상하이(上海)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30년 동안 그는 <중국총보(The Chinese Repository)>를 발행하여 문서선교에 열중하였을 뿐 아니라, ‘광저우기독교연합회’, ‘모리슨교육협회’, ‘익지회’, ‘중화의료선교회’ 등의 선교단체에 참여하였다. 브리즈맨은 이렇듯 문서, 교육, 의료 등의 다양한 사역을 통해 근대중국선교의 기초를 확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가정환경
그는 1801년 4월 22일 미국 마사추세츠주(Macsachusetts)의 벨체르트(Belchertown)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 야곱 브리즈맨(Jsmes Bridgman)은 1640년 커네트커트주(Connecticut)의 하트포드(Hartford)에 정착한 개국공신이었다. 그는 이러한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자녀들의 기독교 교육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는 햄프세어(Hampshire County)에서 열린 부흥회에 참석하여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이듬해 1813년 2월, 그의 나이 12세에 미국공리회(公理會)의 세례교인이 되었다.
  미국은 독립 후 19세기 초에 대부흥운동이 일어나 수많은 젊은이들이 해외선교의 비전을 갖고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특히 영국런던선교회의 선교보고를 즐겨 읽으며 해외선교의 꿈을 키웠다. 당시 중국은 문호를 개방하지 않은 상황이라서 중국무역을 전담하고 있는 영국의 동인도공사는 영국선교사들이 중국에 오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또한 마카오의 포루두갈 천주교 지도자들 역시 기독교 선교사들의 입국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국선교사들은 위와 같은 제한을 받지 않았기에 모리슨선교사(Robert Morrison, 1782-1834)는 기회만 있으면 미국의 각 교회와 선교단체에 선교사 파송을 호소하였다. 미부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 美部會)는 이에 부응하여 중국선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선교사를 파송하여 모리슨을 도와 중국선교를 개척하고자 하였다.
브리즈맨도 역시 미국 대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해외 선교에 큰 부담과 비전을 갖게 되었다. 그는 1826년 암베스트(Amberst College)대학을 졸업한 후 곧바로 암도버신학교(Amdover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여 3년간의 신학교육을 마쳤다. 그가 신학교를 졸업하는 해, 미부회는 그를 미부회의 중국선교사로 정식 요청하였다. 그는 미부회의 초청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1829년 10월 6일, 벨체르트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일주일후인 10월 14일 ‘선원들의 친구 선교회(The American Seaman’s Friend Society)‘ 소속의 아빌(Rev. David Abeel, 雅裨理 1804 -1846)선교사와 함께 뉴욕에서 로마호를 타고 중국으로 출발하였다. 그들은 3개월여의 긴 항해 끝에 이듬해 2월 19일 무사히 광저우에 도착하였다. 모리슨은 친히 항구에 나와 이들을 반갑게 맞았다. 브리즈맨과 아빌은 동시에 중국에 왔지만, 아빌은 미국인들을 상대로 선교하였기에, 역사가들은 브리즈맨을 근대중국에 처음 온 미국선교사로 보고 있다.
아편전쟁 전에는 서방선교사들은 광저우에 거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청(淸)정부는 서방 상인들에게는 상관(商館)이라는 제한된 거주 지역에서 장기적으로 거류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광저우에서 사업을 하던 미국인 올리팬트(D. W.Olyphant, 奧利芬)는 선교활동을 적극 지지하여 초기 광저우지역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50여 명의 선교사들과 가족들이 오고가는 선박비를 부담하였고, 광저우와 마카오지역에서 활동하는 선교단체들의 경비와 자선사업 등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는 브리즈맨의 선박비와 숙소까지 무료로 제공해 주었다.
  모리슨은 그의 중국어선생인 루어(羅)씨를 브리즈맨에게 소개하여 매일 1시간씩 중국어를 배울 수 있게 하였고, 최초의 중국인선교사 양발(梁發)을 소개해 그의 선교활동을 협조하도록 배려하였다. 모리슨은 브리즈맨보다 18살이 많은 연장자일 뿐 아니라, 근대중국에 제일 처음 중국선교를 개척한 런던선교회 소속의 선교 선배이기도 하였다. 당시 청 정부는 문호를 개방하지 않아 공개적으로 전도활동을 할 수 없어서, 모리슨선교사는 동인도공사의 통역관의 신분으로 광저우에 거주할 수가 있었다. 브리즈맨 역시 모리슨선교사의 경우와 같이 미국인 회사인 동부양행(同孚洋行)의 직원으로 활동하고, 양행의 무역특설지구에 거주하면서 마카오와 싱가포르 등을 왕래하였다. 그는 중국선교 30년 동안 17년은 광저우와 마카오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후반 13년은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브리즈맨과 <중국총보>
브리즈맨은 선교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열정과 성실한 태도로 임했다. 그는 중국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중국어의 학습은 가장 중요한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하여, 일상 회화 뿐 아니라 중국의 문화와 종교까지 이해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중국어를 구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브리즈맨의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는 영문잡지인 <중국총보(The Chinese Repository, 中國叢報)>를 창간한 일이다. 광저우에서 발행된 중국 최초의 영문 잡지인 <중국총보>는 1832년 5월부터 1851년 12월 정간될 때까지 20년 동안 총 20권에 232기를 발행하였다. 브리즈맨과 모리슨이 공동으로 창간한 <중국총보>는 20년 동안 발표된 문장들이 모두 1,378편에 달했는데, 브리즈맨 혼자서 350편의 글을 투고하여, <중국총보>에 가장 많이 투고한 기고자가 되었다. <중국총보>는 처음에 광저우에서 발행하였지만, 1839년 린저슈(林則徐)가 아편무역을 금지할 때, 마카오로 옮겨 출판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는 미국 선교사가 처음으로 마카오에서 출판활동을 시작한 예가 되었다. 아편전쟁이 끝나고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면서, 브리즈맨은 다시 <중국총보>를 홍콩으로 옮겨 출판하다가, 1852년 12월 정간하였다.  
브리즈맨의 선교 열정과 능통한 중국어 실력이 인정되어 <중국총보>는 많은 사람들의 호평과 존경을 받았다. 브리즈맨 자신도 <중국총보>의 발행은 많은 외국인들에게 중국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전달하여 서로간의 오해와 실수들을 축소시킬 수 있어서 매우 실용적인 학이치용(學以致用)의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브리즈맨은 외국인들이 중국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여 실수와 웃음거리들이 속출하고, 심지어는 필요 없는 오해들까지 유발하여 충돌과 긴장상태가 빈번히 일어나는 것을 해결하기위해 동서의 문화와 지식이 대화와 교류를 통해 서로 이해하고 포용의 필요성을 실감하였다. <중국총보>에 원고를 투고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선교사, 학자, 외교관, 모리슨과 소수의 중국인들이었다. <중국총보>에 보도되는 내용은 중국 언어, 문화, 역사, 예술, 제례의식, 풍속, 종교, 미신, 중미관계, 중영관계와 중국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들은 물론 아시아 각국의 상황을 총망라하여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었다. 귀츨라프는 <중국총보>에서 홍루몽(紅樓夢)을 읽고, 서양인으로 제일 처음 홍루몽에 많은 흥미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영국 여왕 빅토리아가 등극하는 해에  “중국의 여황제 무측천(武則天)에 관해서도 보도하였는데, 여왕의 예가 영국이 처음이 아니라, 중국에서는 벌써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은연중에 밝히려고 의도한 것 같다. 이밖에도 <중국총보>에 전족(纏足)과 아편의 피해에 대해서 수차에 걸쳐 보도했다. 전족은 그 후 여선교사들이 집중 노력하여 선도하고 개선하는 주요한 목표가 되었다. 브리즈맨은 이토록 문서와 교육을 중시하여, 장기적인 안목으로 중국선교에 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중국총보>는 영국과 중국과의 충돌이 가장 치열했던 아편전쟁 시기에 발행되었기에, 아편전쟁 전후의 중영관계를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브리즈맨은 중국어 능력이 월등하여, <중국총보>의 편집과 집필을 열심으로 담당하였을 뿐 아니라, 복음소책자들을 발행하여 복음 활동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문화와 세계 역사와 지리 등에 관한 책들을 번역하여 동서문화의 교류와 이해를 증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중에 대표적인 서적은 그가 1841년 마카오에서 출판한 《광동방언촬요(廣東方言撮要)》이다. 이 책은 중국어, 인체, 친척, 인물, 가정, 상무, 기구, 건축, 농업, 인문과학, 수학, 지리와 광물 등 모두 17장으로 구성되어 중국에 대해 폭넓게 소개하였다. 이 책의 또 하나의 특징은 영어, 중국어 그리고 알파벳으로 표기한 광동어 등 3개국어로 대조하고, 각 페이지마다 주석을 달아 독자로 하여금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편집하였다. 이 책은 미국인이 영어와 중국어를 대조하여 중국 문화를 최초로 서양에 소개한 책이 되었다. 이러한 편집 방식은 외국인들이 중국어를 배우기가 수월하였고, 또한 중국 문화를 이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브리즈맨과 브루인 인쇄소(The Bruin Press, 布魯因印刷所)
브리즈맨은 문서선교를 더 효과적으로 추진하기위하여 인쇄소를 설치코자 하였다. 마침 1833년 미부회는 젊은 선교사 윌리암스(Samuel Wells Williams, 衛三畏, 1812-1884)를 중국에 파송하여 그와 함께 선교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였다. 윌리암스는 그다지 높은 학력은 없었지만, 인쇄 경험이 풍부한 인쇄전문가였다. 브리즈맨은 그를 마카오에 거주케 하고, 그곳에 “브루인 인쇄소”를 설치하여, 윌리암스로 하여금 이 인쇄소를 운영을 맡겼다. 브루인 인쇄소의 모든 설비는 브리커교회(The Bleeker Street Church Society)의 선교단체에서 기증하였는데, 그 기계는 금속야자(冶字)인쇄의 최신 발달한 기계로 <중국총보>와 전도 소책자들을 인쇄출판하기도 하였다. 윌리암스는 마카오에 거류하면서 1848년《중국총론(中國總論)》을 출판했는데, 이는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영문으로 소개한 최초의 서적이다. 윌리암스는 이 책에서 중국은 세계에서 오래전부터 문명이 발달한 문명고국으로 중국의 문화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 책은 후에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 중국사의 교과서로 사용할 정도로 동서문화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53년 윌리암스는 미국 해군 페리장군(Matthew Calbraith Perry, 1794-1858)의 통역관을 맡게 되면서 마카오를 떠나게 되자, <중국총보>는  20년의 역사를 뒤로 한 채 정간되었다. 이후 그는 선교활동보다는 미국공사를 도와 통역관으로 활약하다가 미국으로 돌아가 예일대학의 첫 중국학 교수가 되었다.

브리즈맨과 아편문제
아편의 악영향을 심각하게 절감한 그는 영국의 아편무역을 적극 반대하였다. 광동총독 린저쉬(林則徐)가 아편금연운동을 전개할 때에 그는 <중국총보>를 통해 종교적 입장에서 아편무역을 반대하고, 아편 판매상들을 신랄히 비난하며 중국정부의 금연운동을 적극 변호하였다. 1836년에서 1840년까지 아편금연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중국총보>에는 아편문제와 관련된 48편의 원고 중에 15편이 그의 원고였다. 당시 린저쉬는 서방의 신문과 도서 등을 번역하여 <마카오일보(澳門月報)>에 기재하였는데, <중국총보>의 내용을 가장 많이 번역 보도하였다.
중국 최초의 선교사 량발(梁發)의 아들 량진더(梁進德)는 브리즈맨에게 8년간 공부한 학생이었다. 량진더는 영어에 능통하여 후에 린저쉬의 통역관으로 활약하였다. 린저쉬는 아편에 대한 브리즈맨의 입장을 알기에, 1839년 6월 15일 린저쉬가 후먼(虎門)에서 아편을 폐기할 당시 특별히 브리즈맨을 초청하였다. 브리즈맨은 아편을 폐기시키는 전 과정을 참관하고 린저쉬의 강력한 금연정책을 높이 평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아편을 폐기시키는 모든 작업이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삼엄하고, 엄격한 규제 속에 진행되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의 어떠한 작업도 이처럼 엄격하고 철저히 집행하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브리즈맨이 <중국총보>에 아편무역을 반대하는 글들을 발표하는 것은 공개적으로 린저쉬의 금연운동을 지지하고 선전해주는 결과가 되었을 뿐 아니라, 린저쉬로 하여금 그의 금연운동이 서방의 정통상인들에게 적극적인 호응과 지지를 받고 있다고 확신이 되어, 그의 금연운동을 더욱 강화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므로 린저쉬와 브리즈맨과의 관계도 더욱 돈독히 발전할 수 있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린저쉬는 브리즈맨을 통해서 미국 상인들의 아편무역에 대한 반대의 입장과 태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그는 아편무역을 강력히 반대하기는 했지만, 미국상인들 같은 정통상인들에게 안심하고 정상적인 무역활동에 종사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었다. 브리즈맨과 미부회의 선교사들은 아편무역의 각종 피해와 악영향의 현상들을 국내 각종 여론에 발표하여서 미국 국내에 아편에 대한 반대의 여론을 형성하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편전쟁이 끝난 후에 미국은 수차례에 걸쳐 아편무역을 반대하는 입장과 태도를 중국정부에 분명히 밝히고 있었던 것도 브리즈맨과 같은 선교사들의 숨은 공로가 크다고 볼 수 있겠다.

브리즈맨과 기타 선교연합회의 관계
브리즈맨은 <중국총보>를 발행하여 문서선교에 주력하였지만, 광저우에서 활동하는 다른 선교사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선교하였다. 1930년 광저우에 최초로 조직된 서방 선교단체는 광저우기독교연합회(廣州基督?聯合會)였다. 초기 발기회원은 모리슨, 아빌(Rev. David Abeel, 雅裨理, 1804-1846), 브리즈맨을 포함해서 모두 7명이었다. 연합회는 광저우에 창고와 도서관을 설립하고, 중국 학생들이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중국 성경 교과서를 편집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중국총보>의 한 해 경비를 모금하도록 결정하였다. 이처럼 <중국총보>의 발행은 브리즈맨 개인의 사역이 아니라 광저우의 모든 선교사들이 함께 참여한 연합 사역이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연합회조직은 단기간 활동하다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광저우에서 조직된 두 번째 선교단체는 1834년 말에 성립된 실용지식전파회(實用知識傳播會)였다. 주사역은 중국인들에게 실용적인 지식과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 선교회는 성립한 후 얼마 안 되어「세계통사」, 「영국사」, 「이이솝이야기」를 출판하였다. 브리즈맨은 창립초기부터 이 연합회에 참여하여 서방의 새로운 지식을 통해 효과적으로 선교하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 이 조직은 4년 동안 활동하다가 중단되었지만, 후에 선교사들은 이 연합회의 정신을 이어받아 중국익지서회(中國益智書會)를 조직하여 중국선교와 현대화에 공헌하였다.
브리즈맨이 참여했던 세 번째의 선교연합회는 모리슨교육협회(馬禮遜?育協會)였다. 근대 중국의 최초의 선교사 모리슨은 1834년, 27년간의 중국선교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광저우에서 소천하였다. 그의 동료들은 모리슨의 선교정신을 기리기 위해, 모리슨 선교기념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모리슨이 교육분야에 공헌한 바가 크다고 생각하여 모리슨교육협회를 설립하여, 모리슨의 교육정신을 기념하는 한편 모리슨의 교육정신을 이어받아 중국의 근대교육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브리즈맨은 모리슨교육협회의 창립멤버로 활약하여, 모리슨기념학교를 세우기 위해 열심히 모금하였다. 모리슨교육협회는 1939년 미국 예일대학을 졸업한 브라운선교사(Samuel R. Brown)를 초청하여, 마카오에 모리슨기념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아편전쟁 후 홍콩으로 옮겨와 많은 중국 청년들을 양성했는데, 그중에 롱홍(容?)과 황콴(黃寬)은 근대 중국기독교가 배양한 훌륭한 인재들이었다. 롱홍과 황콴은 브라운선교사가 건강의 이유로 미국으로 돌아갈 때, 그와 함께 미국으로 유학한 유학생이었다. 특히 롱홍은 후에 예일대학을 졸업했는데, 이로써 그는 중국 최초의 유학생으로 미국의 대학을 졸업한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롱홍은 학업을 마치고 중국에 돌아와 중국 근대화에 일생을 바친 애국자이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황콴은 미국의 마사추세츠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후에 영국으로 건너가 에딘버그대학에서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다. 그는 근대 중국에서 중국인으로 최초의 근대식 병원의 의사가 되어 광저우에서 의술 활동을 하였다. 이 두 사람은 교육분야와 의학분야에 각각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는 브리즈맨을 비롯한 중국 초기 선교사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브리즈맨이 참여했던 네 번째 선교연합회는 1838년 광저우에서 설립된 중화의료전교회(中華醫藥傳?會)였다. 회장에는 콜리즈(T. R. College, 柯列治),파커(Peter Parker, 伯駕) 의사, 브리즈맨과 레이(G. T. Lay, 賴伊)가 각각 부주석으로 활동하였다. 이 의료선교회는 서방의 가장 선진된 의학과 의술로 가난한 중국인들을 돕고, 또 환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을 전도하고자 했다. 의학과 의술은 물론 서방의 새로운 의약(醫藥)지식을 가르치고 보급하여 근대 중국의 의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맺는말
브리즈맨은 미국인으로 제일 처음 중국에 온 미국해외선교부총회의 선교사였다. 당시는 중국은 문호가 개방되지 않았고, 아편전쟁까지 발발하는 극도로 혼란한 시기였다. 브리즈맨은 이러한 동서간의 충돌과 마찰이 서로의 이해 부족으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라고 생각하여 이를 해결하기위해서, 영문 월간지 <중국총보>를 발행하여 기독교를 소개하고, 또 동서간 문화교류의 교량역할을 하여, 이해증진과 긴장완화에 도움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는 또 아편문제의 심각성을 절실히 목격하고, <중국총보>를 통해 아편무역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이를 적극 반대하는 용기와 객관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브리즈맨은 문서선교 뿐 아니라 다른 선교회 선교사들과 활발히 연합하여, 교육과 의료 등 매우 광범위한 선교를 전개하여 중국선교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강인규/ 대만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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